가톨릭 교회에서 신자들이 세례명(洗禮名)을 정하는 것처럼 여러 단체(학교, 병원, 성당, 회사 등)도 주보 성인을 정하여 그 분을 통하여 하느님께 우리를 위한 기원(祈願)을 청하고 생전(生前)에 그 성인의 가르침이나 삶을 본받고자 주보 성인으로 모셔 존경하는 것입니다.
성인(聖人) 김대건(金大建) 신부님은 지금으로부터 160년 전 인물로서 우리 나라 최초 신부님이시고, 한국 교회의 수호자(守護者)이시며, 당시 이 땅의 폐쇄적 봉건적 유교 사회에 그리스도의 복음화(福音化)를 위해 갖은 수난(受難)을 겪으시다가 1846년 9월 16일 한강변 새남터 백사장에서 약관 26세의 나이로 순교(殉敎)하신 겨레의 빛이요, 시대의 성웅(聖雄)이시다.
1925년 7월 5일 그를 하느님의 특별한 축복을 받은 자로 존경한다는 것을 교황 비오 11세의 이름으로 만방(萬方)에 선언되었다.
신부님은 성직자로서 뿐 아니라 역사를 빛낸 위인이요, 중국어, 불어, 라틴어 등을 거침없이 구사(驅使)하신 준걸(俊傑)이셨고, 개화의 등불이셨다.
1984년 5월 6일 서울 여의도에서 천주교 200주년 기념에 즈음하여 내한(來韓)하신 교황 요한 바오로Ⅱ세에 의해 성인품에 오르셔 전세계 신자들의 흠모의 대상이 되셨다. 1946년 9월 26일 대건중·고등학교 설립과 더불어 학교 주보(學校主保)로 모시다.

▲ 성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님의 동상(銅像)은 2001년 9월 14일 제막(건립)되어 교정 앞에 서 있다
조선조 헌종 2년(1836) 섣달,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는 10명 가량의 조선인들이 있었다. 이들 일행 가운데는 15세 전후의 세 소년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최초로 조선에 잠입하여 활동하던 프랑스인 모방(Maubant, 한국 성(姓)은 나(羅)) 신부에게 선발되어 머나먼 마카오로 유학을 떠나는 중이었다. 그들 세 명의 이름은 김대건(金大建), 최양업(崔良業), 최방제(崔方濟)였다.
당시 조선에서는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오랫동안 계속되고 있었으므로 모방 신부 자신도 숨어 다녀야 하는 처지였고, 따라서 어떠한 교육도 이룰 수 없었다. 때문에 그는 마카오에 있던 파리외방전교회 극동 지부라 할 경리부의 신부들과 상의한 끝에 어린 소년들을 그곳에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이렇게 하여 조국을 떠나게 되었을 때, 소년 김대건의 나이는 겨우 15살이었다.
김대건 신부는 한국이 낳은 최초의 성직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의 삶은 25년이란 짧은 기간이었고, 사제로서 지낸 기간은 겨우 1년 남짓한 세월뿐이었다. 그러므로 오히려 그의 생애는 최초의 신학 유학생으로서, 그리고 쇄국 조선으로의 입국로를 찾는 고난의 여행자로서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최초의 성직자라는 한 마디가 그를 상징적으로 나타내 주는 이유는, 이와 같은 그의 생애가 곧 성직자가 되기 위한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김대건은 1821년 8월 21일 충청도 솔뫼(현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의 유명한 천주교 집안에서 김제준과 고 우르슬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7살 되던 무렵, 그는 조부 김택현과 양친을 따라 용인 땅 한덕골(일명 골배마실)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이미 그의 증조부인 김진후가 천주교 신자로 체포되어 옥사하였고, 을해박해(1815년)때는 그의 조부마저 참수되었으므로 더 이상 고향에 살 수 없었던 것이다.
그가 처음 여행한 조선의 한양에서 중국의 남단 마카오까지는 약 9천리, 북경을 왕래하는 사신들만이 국경 통과가 허용되던 당시 조선의 현실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먼 여행이었다. 그러나 조선을 떠난 소년 김대건은 동료들과 함께 중국인 신자들의 인도를 받아 1837년 6월 7일에는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카오에서의 신학교 생활은 결코 순탄치만 않았다. 1837년 8월과 1839년 4월에는 그 곳의 민란으로 두 차례나 마닐라로 피신해야 했고, 1838년 11월에는 동료 최방제의 죽음을 보아야 했다. 뿐만 아니라 이 무렵에는 그 자신도 여러 가지 질병으로 고생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편 조국에서 들려오는 소식조차 좋지 않았다. 1839년에는 기해박해가 일어나 교회 지도자들과 많은 신자들의 죽음을 당했고, 모방 신부도 새남터(현 용산 전철역 부근)에서 군문 효수형으로 순교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김대건은 병든 조국, 억압받는 백성들을 구한다는 일념을 더욱 굳혀 가게 되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급선무는 하루 빨리 성직자를 조국에 입국시키는 일이었다. 마카오의 선교사들이 모두 조선 입국로의 개척을 중시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는데, 머지않아 김대건 자신이 이 일을 담당하게 되었다.
김대건의 신학교 생활은 5년만에 끝을 맺어야만 하였다. 1842년 2월, 아편전쟁이 끝나 갈 무렵 프랑스는 세실 함장이 이끄는 함선 2척을 중국에 파견하였는데, 여기에 김대건과 최양업이 통역으로 승선하게 된 때문이었다. 프랑스 신부들은 이것이 조선에 입국할 좋은 기회라 생각하였고, 이에 매스트르(Maistre) 신부를 그들과 함께 파견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함대를 이용한 조선 입국은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김대건이 탄 에이곤호가 마닐라와 대만을 거쳐 4개월 후 중국 오송구(吳松口)에 도착했지만, 전쟁이 끝나자 세실 함장이 더 이상의 북상을 포기한 때문이었다. 조선 입국을 원하던 김대건 일행은 그들과 헤어지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김대건 일행은 스스로 입국로를 찾기로 결정하고, 일시 머무르던 상해를 떠나 요동을 향해 나갔다.
이때부터 김대건의 모험은 시작되었다. 조선 입국 때까지 2년 3개월 여에 걸쳐 이루어진 이 모험으로 그는 건강을 되찾게 되었고 동시에 타고난 의지와 대담성이 더 강해졌으나, 뱃길 1만리, 육로 7천리의 길은 끝없는 고행이 될 수밖에 없었다.
요동 땅 백가점(百家店)에 머물던 김대건은 매스트로 신부와 헤어진 후 가난한 나무꾼으로 변장하고 조선 국경을 향해 나아갔다. 만주 교구장이던 배롤 주교조차도 조선 입국의 위험성을 설명하며 이 모험을 말렸지만, 억압받는 조선 신자들을 구제해야 하겠다는 그의 일념을 단념시킬 수는 없었다. 김대건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자비와 성모 마리아의 도움에 맡기고 있었다.
이후 김대건은 1842년 말과 이듬해 3월, 9월, 세 차례에 걸쳐 의주 변문(邊門)을 탐색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김 방지거라는 신자를 만날 수 있었지만, 조선 귀국로를 얻지는 못하였다. 그는 페레올(Ferreol)주교의 성성식에 참석한 후 1844년부터 동북쪽 국경을 통한 입국로를 찾기 시작하였는데, 두만강을 넘는 길이 변문 보다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는 만주의 팔가자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때 그는 페레올 주교에게 보낸 서한에서 여행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면서 마음대로 조국에 들어갈 수 없음을 다음과 같이 한탄하였다.
“저는 사람이 이 세상에 영원히 머무르는 것이 아니고, 며칠을 지내는 길손에 지나지 않는다는 진리를 얼마나 잘 깨달았는지 모릅니다. 제가 조국의 땅을 밟은 것은 잠깐동안, 그것도 중국 사람 즉 외국인의 자격으로밖에는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인류라는 공동체가 형제 같은 입맞춤을 하며 하느님과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속에서 포옹할 날이 언제 오게 될지.”
1844년 12월, 팔가자로 돌아온 김대건은 페레올 주교로부터 장래가 촉망되는 신학생으로 인정을 받아 최양업과 함께 부제품(副祭品)을 받게 되었다. 이때 사제로 서품되지 못한 것은 아직 24세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제가 된 후 김대건은 서둘러 페레올 주교와 함께 조선에 들어가고자 했다. 조선 신자들에 따르면 12월말이 조선 입국에 가장 적당한 시기였고, 또 김프란치스코라는 신자가 그들을 맞이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해박해 이후 더욱 엄중해진 변문의 경계로 인해 서양 사람인 페레올 주교는 조선에 들어갈 수 없었고, 김대건 부제만이 조선 교회의 밀사들을 따라 변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페레올 주교와 함께 입국하지 못한 아쉬움을 있었지만, 김대건 부제는 1845년 1월 15일에 이르러 다시 한양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지난 8년 동안 그리던 귀국이 마침내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조국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단지 감시와 박해의 위험뿐이었다.
한양에 도착한 즉시 김대건은 페레올 주교의 지시대로 앞으로의 전교 활동을 위한 준비를 시작하였다. 신학생 선발, 조선 지도의 작성, 순교자들에 대한 자료 수집, 안전한 가옥의 매입 등이 짧은 기간에 그가 이룬 일이었다. 여기에서 조선과 상해를 잇는 해로를 찾아내는 일은 더욱 어려웠다. 그렇지만 이러한 일들은 비밀리에 이루어졌고, 마침내는 모두 끝마칠 수 있었다. 그 결과 김대건 부제는 귀국 후 3개월여 만에 상해로 출발하는 배에 오를 수 있었다.
그 배는 작은 어선에 불과했다. 그러나 김대건 일행은 하나의 믿음만을 가지고 상해를 향해 뱃길을 잡아 나갔다. 훗날 김대건 부제는 당시의 어려움을 이렇게 설명하였다.
“첫날에는 순풍에 항해를 했지만 그 뒤로 주야 3일 동안 폭풍우를 돌파해야 했습니다. 배가 너무나 작고 언제나 침몰할 위기에 있었으므로 저희들은 돛대들을 모두 자르고 식량까지 바다에 던져야 했습니다. 인간으로서의 능력이 모두 바닥난 상태에서 저희들의 유일한 희망은 오직 천주와 동정 마리아의 도우심뿐이었습니다. 그 믿음 속에서 일주일쯤 뒤에는 육지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조선을 떠난 지 1달여의 항해 끝에 김대건 일행은 상해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페레올 주교와 새로 중국에 들어 온 다불뤼 신부를 만나 다시 조선에 입국할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조선으로 출발하기 전인 1845년 8월 17일, 김대건 부제는 15세의 어린 나이로 조국을 떠나면서 간직해 왔던 꿈을 마침내 이루게 되었다. 이 날 상해 부근의 김가항(金家港)성당에서 페레올 주교에 의해 사제로 서품된 것이었다. 이로써 김대건 소년은 조국을 떠난 지 8년 8개월 만에 한국 최초의 성직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에서 볼 때, 이것은 무엇에도 비길 수 없는 고난을 예고하고 있었다.
사실, 조선 입국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김대건 신부뿐만 아니라 페레올 주교, 다불뤼 신부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하느님의 종(從)임을 믿는 그들에게 죽음보다 두려운 것은 오히려 조선 교회의 상실이었다.
그들 일행은 상해를 떠난 지 40여일 만인 10월 12일에 조선에 상륙할 수 있었다. 도중에 그들은 폭풍을 만나 제주도에 도착하기도 했지만, 일행을 태운 ‘라파엘호’는 강경 부근의 황산포(黃山浦)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라파엘은 곧 여행자들의 주보(主保)로 존경을 받는 대천사의 이름이었다.
조선에 다시 입국한 후 김대건 신부는 다음 해 4월까지 서울과 용인 지방을 다니며 전교하였고, 여기에서 홀로 된 어머니도 만날 수 있었다. 이어 그는 페레올 주교의 지시로 새 입국로 개척에 나서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그에게 마지막으로 주어진 임무가 되고 말았다. 서울의 마포를 떠난 그의 일행이 연평도와 백령도를 거쳐 순위도(巡威島)로 돌아왔을 때, 그곳 관헌에게 발각되고 만 것이었다.
김대건 신부는 이후 서울로 압송되어 3개월여의 옥중 생활과 문초 끝에, 마침내 9월 15일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을 당하게 되었다. 조선 교회의 재건을 위해 제대로 활동하지도 못한 채 조국으로의 귀국이 영원한 귀향이 되고 만 것이다.
현재 남아 있는 김대건 신부의 글들은 얼마 되지 않는다. 22편의 서한, 초기의 글 한 두 편, 한국 교회사에 관한 3편의 비망록 등이 전부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글들을 통해 그의 내면을 잘 이해할 수 있으니, 그것은 오늘날의 사회에도 귀감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김대건 신부의 사상과 영성의 핵심은 물론 하느님에 대한 효와 사랑이었다. 그의 죽음, 곧 하느님께 대한 순종으로서의 순교는 이것을 그대로 실천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탐욕을 버린 순수한 순교는 자신만이 아닌 형제와 민족을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당시 조선의 입장에서는 분명 프랑스 함대와 선교사들을 불러들이는 행위가 매국이요, 반역자로 인식되었고, 이로 인해 김대건 신부는 국사범으로 다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조선 사회가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고 문호를 개방하는 것이 민족과 국가를 위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또 그는 조국을 등지고 종교의 자유를 원한 것은 아니었으며, 언제나 조국 안에서의 전교 활동을 원하고 있었다.
이렇게 피로써 하느님의 은혜에 보답한 김대건 신부는 진정한 조선인 성직자였다. 그는 조국을 사랑하는 것이 곧 억압받는 조선인들을 하느님의 품안에서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갖가지 모험, 오랜 역경을 스스로 받아들였고, 또 그것을 위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한편, 김대건 신부는 최초로 서양의 신학문을 배운 선각자였다고 할 수 있다. 비록 그의 유학은 신학 수업에 목적이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습득한 서양의 여러 나라 언어나 교양, 그리고 서양에 관한 지식은 당시의 조선인으로서는 누구도 접할 수 없던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프랑스 함대에서 통역 활동을 한 점, 순교하기 전에 세계 지리의 개략을 편술한 점, 영국의 세계 지도를 번역한 점, 조선전도(朝鮮全圖)를 작성한 점 등에서도 알 수 있다.
이와 함께 그는 서양 여러 나라의 사정, 특히 제국주의의 성격과 그들에 의해 이루어진 중국 침탈 사실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서양 선교사의 입국을 주선하면서도 결코 제국주의의 선도자가 되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김대건 신부는 신앙인으로서 종교에 대한 탄압을 순교로 대신했고, 조선의 협소한 세계관에도 폭을 넓혀 준 선각자였다고 생각된다.